지명유래 푸른바다와 넉넉한 인심 가득한 청정의 고장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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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면

고려(高麗) 현종(顯宗) 3年(1012) 특수행정(特殊行政)의 공동체(共同體)인 부곡제도(部曲制度)에 따라 하청(河淸), 장목지역(長目地域)의 하청부곡(河淸部曲)을 두고 칠천도(七川島)에 목장(牧場)을 두었다.

원종(元宗) 12年(1271) 왜구(倭寇)의 침범으로 하청(河淸), 죽토(竹吐), 고정부곡(古丁部曲)의 인물(人物)은 모두 거창현(居昌縣)에 속하는 가조현(加祚縣)으로 피난갔다가 세종(世종2) 4年(1422) 옛터로 돌아왔다.

세종(世宗) 14年(1432) 거제현(巨濟縣)을 사등(沙等)에서 고현(古縣)으로 옮기고 관하에 칠면(七面)을 두었는데 하청면(河淸面)이라하고 권농관(勸農官)이 집정(執政)하였다.

선조(宣祖) 25年(1592) 5月 12日 고현성(古縣城)을 점령한 왜병(倭兵)들이 하청(河淸)장터에서 진을 두고 약탈하므로 거제의병(巨濟義兵)들이 야습(夜襲)하여 대승(大勝)하니 이를 하청(河淸)장터의 설욕전(雪辱戰)이라 하였다.

선조(宣祖) 30年(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7月 14日~16日 칠천량(漆川梁) 물안해역(勿安海域)에서 패전(敗戰)하였다.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으로 저도(猪島), 황포(黃浦), 유포(柳浦), 구영등(舊永登), 농소포(農所浦), 저포(這浦), 장목(長木), 구율포(舊栗浦), 대금산(大今山), 시방(矢方)과 칠천도(漆川島), 사외포(絲外浦), 사곶(巳串), 내가이(內加耳), 외가이(外加耳), 하청(河淸) 등 16방(坊)을 두었다.

고종(高宗) 26年(1889) 리제(里制) 개편으로 하청(河淸)에 석포(石浦), 덕곡(德谷), 해안(海晏), 외가(外加), 하청(河淸), 하구(河龜), 실전(實田), 장곶(長串), 욋포(욋浦), 어온(於溫), 대곡(大谷), 송포(松浦), 연구(蓮龜) 등 13리를 두었다.

고종(高宗) 32年(1895) 5月 26日 칙령 제98호(勅令 第98號) 면리(面里) 개편으로 외포면(外浦面)을 두고 하청면(河淸面)의 율천(栗川), 율리(栗里), 대금(大錦), 시방(矢方)과 연초면(延草面)의 외포(外浦), 이물도(利勿島), 덕상(德上), 덕하(德下), 덕포(德浦)를 관할(管轄)하였으며, 하청면(河淸面)은 하청(河淸), 유계(柳溪), 외상(外上), 덕곡(德谷), 해안(海晏), 사환(巳還), 실전(實田), 석포(石浦), 장곶(長串), 어온(於溫), 욋포(욋浦), 연구(蓮龜), 송포(松浦), 대곡(大谷)과 두모(頭毛), 관포(冠浦), 신촌(新村), 궁농(宮農), 농소(農所), 상유(上柳), 하유(下柳), 구영(舊永), 황포(黃浦), 장목(長木) 등 24리가 되었다.

융희(隆熙) 3年(1909) 6月 25日 칙령 제30호(勅令 第30號) 면(面) 개편으로 외포면(外浦面)을 폐지하고 장목면(長木面)을 신설하여 외포면(外浦面)의 덕상(德上), 덕하(德下), 덕포(德浦)는 이운면(二運面)에 편입(編入)시키고 율천(栗川), 율리(栗里), 대금(大錦), 시방(矢方), 이물도(利勿島), 외포(外浦)와 하청면(河淸面)의 장목(長木), 관포(冠浦), 두모(頭毛), 송진(松眞), 황포(黃浦), 구영(舊永), 상유(上柳), 하유(下柳), 저도(猪島), 농소(農所), 궁농(宮農) 등 17리를 관할하였다.

1915年 6月 1日 도령 제20호 법정동리령(道令 第20號 法定洞里令)에 의하여 석포(石浦), 덕곡(德谷), 유계(柳溪), 하청(河淸), 실전(實田), 어온(於溫), 대곡(大谷), 연구(蓮龜) 등 8리로 통합되었다.

1942年 5月 1日 2차대전(二次大戰)때 부락구제(部落區制) 실시로 석포(石浦), 덕곡(德谷), 해안(海晏), 서항(西項), 서대(西大), 서상(西上), 동리(東里), 서리(西里), 중리(中里), 창동(倉洞), 성동(城洞), 사환(巳還), 와항(瓦項), 실전(實田)과 장곶(長串), 어온(於溫), 물안(勿安), 대곡(大谷), 송포(松浦), 황덕(黃德), 연구(蓮龜), 곡촌(谷村), 금곡(琴谷), 옥계 등 24개(個) 부락(部落)이 되었으며 광복후(光復後) 신동(新洞), 신창(新倉)이 분리되어 26개(個) 행정리(行政里)가 되었다.

1977年 7月 1日 군조례 제412호(1977年 6月 15日 공포(公布):郡條例 第412號)로 하청면 칠천출장소(河淸面 七川出張所)를 설치하여 어온(於溫), 대곡(大谷), 연구(蓮龜) 등 3리의 장곶(長串), 물안(勿安), 대곡(大谷), 송포(松浦), 황덕(黃德), 연구(蓮龜), 곡촌(谷村), 금곡(琴谷), 옥계 등 10개(個) 행정리(行政里)를 관할하였다. 하청면(河淸面)은 서북쪽 칠천도(漆川島)가 가로막아 어두운 호수(湖水)같은 바다였으나 옛날 해안면(海晏面)이었다는 구전(口傳)에 따라 보름달이 고요한 바다 호수(湖水)에 반사되어 하늘과 땅이 밝으니 하청(河淸)이라 하였으며 칠천도(七川島)라 개칭하였다.

석포리(石浦里)

영조(英祖) 45年(1769) 내가이방(內加耳坊)에 속하였으며 고종(高宗) 26年(1889) 석포리(石浦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앵산(鶯山)밑 서쪽에 위치하여 지형이 가파르고 돌이 많은 갯마을이라 석포(石浦) 또는 돌개라 하였다.

덕곡리(德谷里)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으로 내가이방(內加耳坊)이라 하였는데 고종(高宗) 26年(1889) 덕곡(德谷)과 해안리(海晏里)로 분리 개칭하였으며 1915年 6月 1日 덕곡리(德谷里)로 통합하여 법정(法定)되어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部落區制)로 덕곡(德谷)과 해안(海晏)의 2구(區)가 되어 1961年 10月 1日 행정리(行政里)로 되었다.

  • 덕곡(德谷)마을
    • 유계평야(柳溪平野)가 있는 마을을 외가이(外加耳)라 하였는데 이는 앞에 넓은 광이(廣耳)바다가 있다는 뜻이며 뒤는 큰 골짜기이므로 덕곡(德谷)이라 하였으며 옛날 개안, 금장, 먹개 등으로 부르고 있다.
  • 해안(海晏)마을
    • 하청(河淸)의 서쪽 덕곡(德谷)의 동쪽에 위치하여 해안따라 넓은 들이 있고 저녁노을에 밝은 햇살이 비추어 고요한 하청바다를 감싸주는 마을이라 해안(海晏)으로 하였다.
유계리(柳溪里)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으로 외가이방(外加耳坊)에 속하였는데 고종(高宗) 32年(1895) 유계(柳溪)와 외상리(外上里)로 개칭 분리되었는데 1915年 6月 1日 부락구제(部落區制)로 서항(西項), 서대(西大), 서상(西上), 동리(東里)의 4구(區)가 되어 1961년 10월 1일 행정리(行政里)로 되었다.

  • 동리(東里)마을
    • 앵산(鶯山)에서 흐르는 냇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유계(柳溪)라 하였는데 그 동편에 있으니 동리(東里)라 하였다.
  • 서상(西上)마을
    • 유계천 상류에 위치하여 서편 윗마을이라 서상(西上)마을이다.
  • 서대(西大)마을
    • 서상마을 밑에 있는 큰 마을이라 서대(西大)마을이다.
  • 서항(西項)마을
    • 유계리의 북편 바닷가에 위치하여 본래 새앙몰 또는 큰골, 각곶이 등으로 불리었는데 동북에 땅끝이 있어 목이 생겼으니 서항(西項)이라 하였다.
하청리(河淸里)

高麗 顯宗(고려 현종) 3년(1012) 하청부곡을 두었는데 조선세종 14년(1432) 하청면을 두었고 영조 45년(1769) 坊里개편으로 하청방이었으며, 고종26년(1889) 하청과 하구리로 나뉘었다가 동32년(1895) 다시 하청리에 합치고 1915년 6월 1 일 법정리가 되었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서리,중리,창동,성동,의 4구였다가 1961년 10월1일 행정리가 되고 그후 신동과 신창이 신설되어 6개 행정리가 되었다.

  • 서리(西里)마을
    • 본래 건너청 또는 건너 하청이라 하였으며 하청의 서남쪽에 위치하니 서리라 하였다.
  • 중리(中里)마을
    • 하청의 동편 대금산의 줄기를 받아 본래 새앗골이라 하였으며 창동과 서리의 사이에 있으니 중리라 하였다.
  • 창동(倉洞)마을
    • 본래 하청의 본 마을이고 큰 곡창이 있었음으로 창골 또는 창동이라 하였다.
  • 성동(城洞)마을
    • 하청의 북쪽에 위치하여 본래 잿골 또는 짝골이라 하였는데 용등산과 녹감산에 둘러쌓여 성안 같다하여 성동이라 하였다.
  • 신동(新洞)마을
    • 본래 하청장터가 있었고 1913년 처음으로 면사무소를 설치하여 마을이 번창하여 신동이라 하였다.
  • 신창(新倉)마을
    • 창동위 성동마을 밑에 위치하여 1990년대 초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신창(新倉)마을을 분리하였다.
실전리(實田里)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으로 사외포방(絲外浦坊)이라 하였는데 고종(高宗) 26年(1889) 실전리(實田里)로 고쳤고 동(同) 32年(1895) 실전(實田)과 사환리(巳還里)로 나뉘어 졌다가 1915年 6月 1日 실전리(實田里)로 법정(法定)하였으며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部落區制)로 실전(實田), 와항(瓦項), 사환(巳還)의 3구(區)가 되어 1961年 10月 1日 행정리(行政里)가 되었다.

  • 실전(實田)마을
    • 본래 실밭개라 하여 사외포(絲外浦)라 하였는데 실밭이 사전(絲田), 실전(實田)으로 바뀌어졌다 하며 밭들이 많아 면화(綿花)와 대마(大麻)를 재배하였다는 곳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선무원종이등공신 여막동(宣武原從二等功臣 余莫同)이 마을을 이룩하였다는 구전(口傳)이 있다.
  • 사환(巳還)마을
    • 하청의 북쪽 용등산(龍登山) 밑에 위치하여 본래 뱀곶이 사곶(巳串) 또는 뱀고지라 하였는데 임진왜란을 끝내고 선무원종이등공신 김옥춘(宣武原從二等功臣 金玉春)이 을사년(乙巳年:1605)에 돌아 왔으니 사환(巳還)으로 하였다.
  • 와항(瓦項)마을
    • 본래 왜곶이 또는 사환(巳還)의 서쪽 바닷가로 외환(外還)이라 하였는데 신라(新羅)때의 기와 쪽편이 발굴되었으니 기와굴이 있었다하여 와항(瓦項)이라 하였다.
어온리(於溫里)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으로 칠천도방(漆川島坊)에 속하였으며 고종(高宗) 26年(1889) 어온(於溫)과 장곶리(長串里)로 되어 1915년 6월 1일 어온리(於溫里)로 통합하여 법정리(法定里)가 되었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部落區制)로 어온(於溫), 장곶(長串), 물안(勿安)의 3구(區)가 되어 1961년 10월 1일 행정리(行政里)로 되었다.

  • 어온(於溫)마을
    • 본래 어온개 또는 어온이라 하였는데 칠천도 옥녀봉(七川島 玉女峯)이 서북을 막아주고 송진만의 안개에 위치하여 마산(馬山)내왕의 선창이 있는 따뜻한 곳이라 어온(於溫)으로 하였다.
  • 장곶(長串)마을
    • 거제도(巨濟島)와 칠천도(七川島) 사이 430m의 바닷가에 나루터가 있는 땅끝임으로 장곶이라 하였고 3개 법정리에 10개 행정리와 칠천출장소(七川出張所)가 설치되어 차도선(車渡船)이 운항되고 있었으나 1996년 12월 19일 칠천연륙교(七川連陸橋) 길이 455m의 가설이 시작되어 2000년 1월 1일 칠천연륙교가 개통되었다. 일명 장안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장곶이 마을이다.
  • 물안(勿安)마을
    • 본래 물안개 또는 몰안개라 하였는데 이는 송진만에 접하는 칠천도(七川島)의 안개라는 뜻이며 선조(宣祖) 30年(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7月 14日~16日의 칠천량패전(漆川梁敗戰)으로 몰살 되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북에 구등산이 막아 바다가 잔잔하여 편안한 갯마을 물안이다.
대곡리(大谷里)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때 칠천도방(漆川島坊)에 속하였으며 고종(高宗) 26年(1889) 대곡(大谷)과 송포리(松浦里)로 분리되었는데 1915年 6月 1日 도령 제20호 법정동리령(道令 第20號 法定洞里令)으로 대곡리(大谷里)가 되었으며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部落區制)로 대곡(大谷), 송포(松浦), 황덕(黃德)의 3구(區)가 되었고 1961年 10月 1日 행정리(行政理)로 되었다.

  • 대곡(大谷)마을
    • 칠천도(七川島)의 서북단에 위치하여 본래 한실이라 하였는데 이는 옥녀봉(玉女峯) 밑 큰 골짜기 큰 마을이라 하여 대곡(大谷)이 되었다.
  • 송포(松浦)마을
    • 칠천도(七川島)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본래 솔개라 하였는데 이는 송림(松林)이 울창하여 송포(松浦)라 하였다.
  • 황덕(黃德)마을
    • 대곡(大谷)의 서쪽바다 황덕도(黃德島)의 섬마을로 면적 0.2㎢로 숲이 울창하여 크고 작은 노루가 서식함으로 누른덕 또는 노인득도라 하여 황덕도(黃德島)라 하였다.
연구리(蓮龜里)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으로 칠천도방(漆川島坊)에 속하였는데 고종(高宗) 26年(1889) 연구(蓮龜)와 욋포리(욋浦里)로 나뉘어졌다가 1915년 6월 1일 연구리(蓮龜里)로 법정(法定) 통합되었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部落區制)로 연구(蓮龜), 곡촌(谷村), 금곡(琴谷), 옥계(玉계)로 4구가 되어 1961년 10월 1일 행정리(行政里)가 되었다.

  • 연구(蓮龜)마을
    • 칠천도(七川島)의 서편 광이(廣耳)바다에 접하여 본래 드메, 두메 또는 연구라 하였는데 이는 서북에 냉질산이 막아 포구를 이룩하고 거북이 모양의 산과 바다를 상징하여 연구(蓮龜)라 하였다.
  • 곡촌(谷村)마을
    • 옥녀봉(玉女峯) 밑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하여 본래 골애마을이라 하였으니 곡촌(谷村)으로 하였다.
  • 금곡(琴谷)마을
    • 칠천도(七川島)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곡촌(谷村)의 아랫마을이고 서남에 화전산(花田山)이 길게 뻗어 있고 뒤의 목이 가야금 모양이라 금곡(琴谷)이라 하였다.
  • 옥계(玉계)마을
    • 본래 외질개 또는 욋개라 하였는데 이는 칠천도의 밖개라는 뜻이고 서남으로 뻗은 땅끝의 형세가 비녀모양이라 옥계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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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면  총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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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균욱 (☎ 055-639-6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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