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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기념관

조성

거제시 둔덕면 방하2길 10(방하리 507-5번지)은 청마의 출생지로서 대지면적 645㎡에 연면적 64.43 ㎡로 2000년 5월에 복원되었다. 생가는 두 채의 초가로 싸리대문, 텃밭과 우물 등 청마가 태어난 1908 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거제시는 2001년 1월 28억50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착공에 들어 가 2007년 12월 전시관과 사무실이 갖추어져 있는 지하 1층에 지상 2층의 연면적 517㎡의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기념관과 생가는 나란히 같이 붙어 있으며 청마의 묘소는 처음 부산 하단동 승학산 기슭에 안장되었다가 양산시 백운공원 묘원으로 이장, 그 후 1997년 4월 3일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지전당골 선산으로 청마선생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선생께서 생전에 사모비에 적힌 소원대로 어머니의 묏가에 영 원히 잠들어 계신다.

청마의 생애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인 청마 유치환은 1908년 음력 7월 14일 아버지 유준수와 어 머니 박우수의 5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로 널리 알려진 동랑 유치 진이다. 유치환의 남성적이고 꼿꼿한 선비 기질은 아버지에게서, 예술적인 기질은 어머 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한다. 청마 유치환은 11세까지 한학을 배웠으며, 어린 시절의 한문 교육은 이후 그의 시에서 빈번한 한자 사용의 바탕이 되었다.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해 1922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도요야마중학교에 입학한다. 동경유학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문학에 눈을 뜨게 되는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청마 시의 중심에 자리 잡 고 있는 니체적인 허무주의, 실존의식들과 무정부주의의 성향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1926년 한의원을 하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 년에 편입, 1928년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28년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학교 출신 안동 권씨(權氏) 재순(在順)과 결혼하였다. 알고 사귄지 10년 만의 일이다. 인전, 춘비, 자연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문단의 등단

1930년 『문예월간』 제2호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때 청마는 통영, 부산 등지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이육사, 이상, 정지용, 김소운 등과도 친밀 하였다. 1937년 당시 시단을 풍미했던 정지용의 시에 감동하여 형 유치진과 함께 동인 지 『생리(生理)』를 발간,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9년에는 <깃발>이 수록되어있 는 첫 시집 『청마시초』 발간과 더불어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1957년에는 한국 시인협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청마 유치환은 시인으로, 또 교육자로서 평생을 보냈다. 결혼 후 평양, 부산을 전전하던 청마는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40년 3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농장경영을 하겠다고 가족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장 관리인으로 지내는 한편 정미소를 경영했다.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된 여러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 북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들이다. 1945년 광복 직전인 6월, 귀국해 부인은 통영 문화유치원을 운영하고 유치환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했으며, 10월에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통영여중을 시작으로 경남고, 경남안의중, 경주고, 경주여중고, 대구여고, 경남여고 등에 서 교사와 교장을 역임했으며, 1967년 2월 13일(당시 60세) 부산남여상 교장 재임 시 문인협회 참석 후 귀가 중 부산 좌천동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한국문단의 거목이다.
청마는 1939년 『청마시초』에서 사용된 호가 청마로 굳어지게 되었다. 청마의 호 유 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노작 홍사용이 유치환의 얼굴을 보고 자네 얼굴이 마면 (말상)이니 청마라 함이 좋지 않을까 했다는 설과 차영환 시인의 주장과 같이 울릉도, 파 도와 같이 바다에 관한 시가 많은데 스스로 푸른 갈기를 세우고 오는 파도의 이미지를 형상화 하여 청마라 했다는 설이 있다.

청마의 편지

청마 유치환을 이야기할 때 시조시인 이영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부남 국어교사 였던 유치환과 21살 젊은 나이로 딸 하나를 키우던 가정교사 이영도는 통영여중에서 같이 일하게 된다.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은 세기의 어느 사랑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들 만큼 긴 편지를 쓰며, 20년간 사랑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20년간 5천여통의 편지가 오 갔으며 1년에 250통 가량을 쓴 셈이 되니 3일에 한 번씩 쓴 것이다. 청마는 생전에 "절도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했 다. 유부남이던 자신과 과부였던 이영도와의 사랑이 꽤나 괴로웠던 모양이다. 청마 사 후 이영도는 청마에게 받은 수천통의 애정편지를 정리하여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 네라』라는 애정 서간집을 발간하였다. 1968년 비소설 부문에서 베스트셀러였다. 단행 본으로는 유래가 드문 2만 5천부의 판매 부수를 올렸다. 1966년 12월 31일자 편지에 는 청마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의 편지를 정리해 곱게 책을 냅시다요...' 많은 문인들 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간집을 낸 것은 청마 생전의 바람을 이영도가 이룬 것으로 보 인다. 천재시인의 메마른 영혼에 예술적 혼을 불어 넣은 여인이 이영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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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 관광국 문화예술과 문화예술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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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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