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한려수도의 관문에 토성(土城)을 쌓아 왜성(倭城)이라 하였는데 넓은 등성이 들판이라 번득이라 하여 광리(廣里)마을이 되었으며 육지와의 바다 560m에 거제도(巨濟島)로 오는 송전탑(送電塔)이 있다.
통영반도(統營半島)와 거제도(巨濟島)사이 560m를 바라보는 곳으로 고려(高麗) 의종(毅宗) 24年(1170) 정중부(鄭仲夫)의 경인란으로 왕(王)이 거제도(巨濟島)로 추방되어 오면서 건넜다하여 전하도(殿下渡)라 불렀으며 선조(宣祖) 25年(1592) 7月 10日 임진왜란때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왜선(倭船) 30여척을 격파한 후 나룻터가 생겼고 1950年 11月 27日 UN군(軍) 거제도(巨濟島) 포로수용소 설치로 차도선장(車渡船場)이였다가 1971年 4月 8日 거제대교(巨濟大橋)가 개통되어 육지가 되었다.
거제대교(巨濟大橋) 옆에 통영(統營)과 거제시내(巨濟市內)버스의 정류장 설치와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새마을이 형성되어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견내량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견내량에서 등성이로 올라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구:폐왕성)(사적 제509호) 동쪽 아래를 지나서 둔덕면 거림로 가는 고개이다.
한려수도(閑麗水道)의 통영반도(統營半島)와 거제도(巨濟島)를 연륙하는 큰 다리로 1965年 5月 30日 기공하여 1971年 4月 8日 준공개통 하였으며 바다위 560m와 육지연결 180m 총길이 740m에 폭 10m이고 수면높이 18m의 아취형으로 당시 공사비 6억9천2백만원에 현대건설의 기술진이 서독식(西獨式) 공기잠함공법(空氣潛函工法)으로 건설하였고 통과하중(通過荷重)은 50M/T이며, 난간 기둥에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의 휘호 거제대교(巨濟大橋)가 새겨져 있다.
의종(毅宗) 24年(1170) 10月 2日 왕이 쫓겨왔으니 전하도(殿下渡)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후 나룻터였고 6.25 한국동란(韓國動亂)으로 포로수용소 설치에 따라 차도선장(車渡船場)이였다가 거제대교(巨濟大橋)의 개통으로 어선의 항구가 되었다.
덕호리(德湖里)의 서남쪽 둔덕면(屯德面)과 접하는 바닷가에 임진왜란(壬辰倭亂) 7년동안 일본군이 둘레 350m의 토성(土城)을 쌓아 견내량(見乃梁)목을 감시하던 곳으로 번득의 왜성 또는 외성이라 한다.
견내량앞 서쪽바다에 소나 말의 먹이를 주는 나무그릇인 구유모양의 암초가 있다.
번득 북쪽 다리미골 서남쪽에 백일홍이 많은 등성이다.
왜성 번득 북쪽에 일명 대리목골의 골짜기다.
견내량의 북서쪽 바다에 암초가 있고 그 여에 등대가 있다.
왜성 번득의 동남쪽 골짜기에 1952년에 건설한 몽리면적 50㏊의 저수지로 번득의 천수답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견내량 동남쪽에 있는 등성이 높이 30.1m에 세부측량의 삼각점이 있다.
번득 북동쪽 호만골 남쪽에 박첨지가 살았다는 골짜기다.
왜성끝 앞바다에 보리섬 모양의 암초가 있다.
광리 북동쪽 다리미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다.
견내량 동남쪽에 산신제를 지내던 골짜기다.
광리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다.
왜성 서남쪽 끝에 있는 갯마을이다.
왜성 성끝땀 남쪽에 물이 흔한 들판이다.
견내량 동쪽에 있는 등성이다.
광리 북동쪽 다리미골 남쪽에 언덕이 있는 골짜기다.
왜성 성끝땀 서쪽에 있는 산이다.
견내량 동쪽에 나무는 없고 풀만 있는 거친들 버덩이 있다.
광리 서쪽 성끝땀 동쪽에 장승 벅수가 있었다.
고려 의종왕이 정중부의 경인란으로 동왕 24년(1170) 10월 2일 거제도에 건너온 견내량을 지금도 전하도라 한다.
견내량 동북쪽 등성이에 약초인 뿌리의 자근(紫根)이란 지치를 재배하였다.
견내량 서북쪽 바닷가에 있는 작은 산이다.
견내량 동쪽에 넓고 편편한 두개의 바위가 있는데 명절때가 되면 총각.처녀가 앉아 놀던 바위다.
견내량 남쪽에 깊숙한 골짜기위에 있는 등성이다.
광리 동쪽에 병풍모양의 바위가 있다.
광리 북동쪽 엉골 남쪽 골짜기에 논물을 대기 위한 홈통이 있었으니 일명 홈안골이라 한다.
담당부서
최종수정일 : 2020-11-16